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시대, 역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비상시非常時’가 일상화된 사회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이제 일에 관한 기존의 ‘매뉴얼’을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인 경력 모델’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제 기업은 학력이 높은 사람보다는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어떤 상황에든 유연하게 대처하며 스스로 자기 활동을 적절히 운영할 수 있는 인재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즈니스 퍼슨 business person’은 개개인이 일을 수행하는 능력을 갈고 닦아 자신의 가치를 계속 높여가야 합니다.
일이라는 사회 참여 행위는 반드시 ‘타자의 승인’ 혹은 ‘타자의 주목’이라는 요소를 동반합니다. 사람은 일을 통해 그렇게 되기를 강하게 원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이를 ‘타자의 어텐션attention’이란 말로 설명해왔는데요, 이는 ‘사람은 왜 일하는가’를 생각할 때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나다움’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합니다. 하나는 스스로가 알고 있는 ‘나다움’입니다. 사람들이 ‘나다움’이라는 말을 할 때는 대부분 이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다움’ 이외에도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의 ‘그다움’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다움’은 종종 자기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다른 사람이 본 ‘그다움’은 객관적이며 정곡을 찌를 때가 많습니다.
중압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처방전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 처방은 바로 하나의 영역에 자신을 100퍼센트 맡기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일에 임하는 자세도 그렇고, 삶의 방식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일에 전부를 쏟아 붓지 않는 것,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곁눈질하지 않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모습이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모습에서는 어떤 존엄함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나의 전부를 쏟아 부으며 열정을 다하지 않는 것, 하나의 일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 태도는 불성실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역시 어느 정도는 자기 방어책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의 영역에 나를 100퍼센트 맡기지 않는 것은 자신이 망가지지 않게 하는 보험, 이른바 리스크 헤지risk hedge(위험 회피)인 것이지요.
축이 되는 다리가 아닌 나머지 다리 하나는 가급적 다른 곳에 걸쳐두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내 안에 바꿀 수 있는 채널을 몇 개쯤 만들어두고 일을 끝내면 일단 다른 채널로 의식을 옮깁니다. 예를 들어 가정이나 육아에 힘쓰는 것도 좋고 취미에 몰두하는 것도 좋습니다. 친구를 만나거나 자원봉사 혹은 지역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한 가지 일로만 가득 찬 버거운 삶을 살고 있다면 일이 잘 안 풀렸을 때 정신적으로 몹시 위험한 상태에 빠지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돌연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중단되었을 때 그 프로젝트에 온 몸과 마음을 바치던 사람이라면 ‘내 인생은 이제 이걸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 내 안에 이를 보완해주는 차선책이 있다면 상황은 매우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러하겠지만 다차원의 축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리스크에 강합니다.
자연스럽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적 동기에 진정으로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고들 하니 학습하는 모방 단계를 넘어 (그 일이) 나만의 동기와 사명감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는 내면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목적의식과 뜻이 바탕에 없다면 아무리 다방면에 재능이 있다 해도 일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또 진정한 의미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문득문득 과거를 돌이켜보다가 ‘아, 나라는 사람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 때가 있습니다. 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나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일부’입니다. 정말로 그렇구나 싶습니다. 구마모토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만남, 대학 시절의 만남, 유학 시절의 만남, 비상근 강사 시절의 만남, 그리고 대학 교원이 된 이후의 만남. 그러한 만남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저는 없을 터이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되지도 않았을 터입니다.